한달 전 쯤, 거래가 뜸했던 은행에 갔다.
이야기 1.
2015년 마지막 거래가 찍힌 통장과 도장을 들고 갱신을 하러 갔다.
창구 담당자가 계좌 복구는 불가능하고 필요하면 신규 계좌를 만들수는 있다고 한다.
만들어달라고 하자 방어적인 빠른 말로 '만드는 이유가 뭐세요? 이 근처에서 일하세요? 뭐 개인 사업 같은거 하세요?'
약 3초간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머릿속은 프로세싱 중이다.
...
내 행색이 어떤가 잠시 생각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고정 수입과 명함이 없는 주부가 통장 개설하러 왔다고 생각했구나.
아. 재직증명서를 뗄 수 없는 주부를 이렇게 쳐다보겠구나.
잠깐의 백수시절에 나를 정의할 보조수단이 없어서 어색했던 몇 번의 순간과는 또 다른 불편함이었다.
도대체 나한테 왜이래. 그냥 계좌가 필요한 이유를 물어보고 서류 준비 할 수 있냐고 확인하면 되는데 왜 몰아붙이지?
대체 나를 왜 저렇게 쳐다보는건가. 금융사기를 당한 가련한(혹은 -그 눈빛이 말하는 바를 해석하자면- 아둔한) 미래의 피해자임을 확신이라도 하는지?
이야기 2.
오후에 나는 은행을 다시 갔다.
재직증명서 대신 소득을 보여주는 원천징수서와 인사정보 화면 인쇄본, 사원증을 가지고 갔고, 막힘없이 계좌를 만들고, 체크카드를 만들고, 인터넷 뱅킹을 텄다.
그리고 내 옆에는 어떤 영감님이 반말로 (고성은 아니었지만) 화를 내고 있었다.
계좌를 만들 수 있는 어떤 증빙 서류도 없고, 서류를 준비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보였지만, 계좌만큼은 강력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창구에서 열심히 진정을 시키며 설명하던 직원(여자)이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았고, 더 설명해주겠다며 이 사람을 데려간 다른 직원(중년 남자)에게는 더 크게 화를 내고 있었다.
이런 규칙은 누가 만든거냐, 니들은 뭐하냐 틀린거 안고치고, 누구한테 말하면 되냐, 내 친구는 했다더라, 대통령한테 말하면 되냐..(정확히는 현직 대통령의 실명을 존칭없이 언급했다.)
아무 소용없이 열정을 불태우는 이분은 금융실명제 발표되던 해까지만 현역에서 활동하던 분인가보다.
계좌를 만들기 위해서는 신분증이 있으면 되던 때.
...
대포통장이네 뭐네 하도 문제가 많아서 돈이 있어도 계좌하나 개설할 수 없는게 은행 창구 직원의 잘못도 아니요, 이런 대책밖에 못내놓는 금융감독원 잘못도 전부는 아니요, 그저 범죄자들 탓이다.
허구헌날 서울중앙지검 직원이라며 나를 찾고 시큰둥한 내 반응에 툭하면 욕지기까지 해대는 그 범죄자들.
아니 그 보다, 계좌 만들기 쉬웠던 그 시절을 기억하는게 제일 문제인가. 처음부터 만들기 어려웠다면 영감님도 저렇게 흥분하지는 않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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